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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며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나는 쏜살같이 달려오는 차를 미처 발견치 못해 길에서 나동그라졌다. 병원응급실에서 기적적으로 생명은 건졌지만 의식이 돌아오는 순간부터 난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눈앞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의사는 안구를 기증하는 사람만 나서면 희망이 있다는 말로 나와 가족들을 위로했지만 병실을 지키는 어머니의 숨죽인 울음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미쳐버리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곱 살이나 여덟살쯤 됐음직한 아이가 내 침대 곁에서 말을 걸어왔다. ˝아저씨, 아저씬 여긴 왜 왔어요?˝ 난 아무 대꾸도 하고싶지 않아 “꼬마야, 아저씨 귀찮으니저리 가서 놀아.”하고 물리치자 “아저씨 왜 그렇게 눈에 붕대를 감고 있어요? 꼭 미이라 같다”하고 말했다. 나는 “야! 이 꼬마가 정말! 너 저리가서 안 놀래!” 하고 소리쳤고, 아이는 금새 울듯한 소리를 내더니 떨어졌다. 그러나 넉살도 좋은 앤지 다음날도, 그 다음날에도 여전히 말을 걸어왔다. 알고보니 같은 병실을 쓰고 있는 환자였다. 아이는 보호자가 없을 때마다 내 곁에 와서는 “아저씨, 근데. 아저씨 화내지 말아요.. 여긴 아픈 사람 투성인데 아저씨만 아픈거 아니자너여. 그러지 말고 아저씨 나랑 친구해요.” 하고 말을 붙혀왔다. “꼬마야, 아저씨 혼자 있게 좀 내버려 둘래?” 나는 아이의 목소리만 들어도 귀찮아서 점잖게 타일렀지만 아이의 맹랑함에 지쳐 결국 웃음이 나왔고, 어느 정도 병실생활에 익숙해지자 아이의 외로움이 피부로 느껴져 “아저씨가 친구해줄께.” 하고 승낙했다. 아이의 이름은 오정혜. 나이는 일곱 살이었다. 그동안 병실에 친구가 없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는지 아이는 잠시도 쉬지 않고 종알거렸다. “아저씨, 그런데 아저씨는 왜 그렇게 한숨만 푹 푹 셔요? 울 엄마가 그랬어요. 병이란 마음먹기에 달렸다구요. 내가 환자라고 생각하면 환자지만. 환자라고 생각 안하면 환자가 아니래요. 전에 아저씨 침대 쓰던 언니가 하늘나라에 갔는데 엄마는 그 언니가 착한 사람이라서 하늘에 별이 됐다고 했어요. 별이 돼서 어두운 밤에도 사람들을 무섭지 않게 환하게 해준다고요….” 난 가족과 동료들의 걱정소리를 듣는 것보다 아이의 티없는 충고가 더 편해서 곧잘 정혜와 어울렸다. 저녁이면 휠체어를 타고 병원마당을 산책했는데, 내 휠체어를 밀어주던 정혜는 7살 꼬마라고 느끼기엔 놀라운 어휘로 주위 사람과 풍경 얘기 등을 들려주었다. “아저씨, 주사놓는 의사선생님 코는 완전 딸기코에다 입은 하마입, 그리고 눈은 쭉 올라가서 무섭게 생겼다!. 나 첨 병원오던 날 정말 그 선생님 보고 집에 가겠다고 막 울었어.” 아이는 어느새 친구처럼 말을 놓았고, 나는 정혜의 재잘거림을 들으며 연신 웃음을 흘려야 했다. ˝ “근데 정혜는 꿈이 뭐야?” “음 .나 아저씨랑 결혼하는 거.” 나는 아이의 맹랑함에 또한번 놀라 “정혜는 아저씨가 그렇게 좋니?” 하고 묻자 “응.” “내가 그렇게 잘생겼어?” ˝아니, 아저씨 디게 못생겼다. 꼭 포켓몬스터 괴물같애.” 하고는 깔깔 웃어대는게 아닌가. 어쨌든 그런 정혜와의 헤어짐은 의외로 빨리 왔다. 안구기증자가 있을 때까지 집에서 요양을 하라는 의사의 말에 나는 퇴원했고 아이는 울면서 “아저씨. 나 퇴원할 때 꼭 와야 돼 알겠지! 응?”하며 하염없이 울먹였다. 우는 아이를 뒤로 한 채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곧 정혜 생각보다는 나자신의 절망에 빠져 아무 생각도 나지않았다. 그리고 한 달 후 병원에서 안구기증자가 나섰다는 연락이 왔다. 세상을 얻은 듯한 기쁨과 희망으로 병원으로 달렸고, 이식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붕대를 풀 무렵 그제서야 안구기증자 가족에게 감사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에 신원을 의뢰했다. 그리고 기증자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난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기증자는 다름 아닌 정혜였던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퇴원하고 일주일 뒤가 정혜의 마지막 수술날이었던 것이다. 아이는 소아암 말기환자였고, 이미 가망이 없어 치료를 중단한 채 아이가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배려했던 것 같다. 목소리만 들어도 쓰러질 것만 같은 정혜엄마는 먼 하늘을 바라보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정혜가 참 즐거워했어요. 댁이 입원했을 때…. 수술실에서 그러더군요. 병이 나으면 아저씨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하늘나라에 가면 꼭 아저씨에게 눈을 주고싶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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