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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섭리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다.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 중매로 만나서 교제하던 여성과 약혼날짜를 잡던 날이었다.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오던 길목에서 느닷없이 잊혀졌던 한 여인을, 아니 한 소녀를 기억해낸 것이다. 8년 동안이나 잊고 있었던 한 여자를….
그녀를 만난 것은 재수학원이 즐비했던 서울 종로거리의 한 분식집에서였다.
그때 재수를 해서도 부모님이 원하는 일류대를 들어가지 못해 삼수를 시작한 나는 연이은 실패로 인해 좌절의 늪에 빠져있었고, 우연히 들렀던 그 분식집에서 씩씩하고 발랄하게 일하던 그녀를 본 순간 살맛을 되찮은 기분이었다. 판에 박힌 학원강사들의 강의는 지겹기만해 나는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그녀를 보기 위해 자주 그 분식집에 들렀다.
친구들은 모두 대학생이 되어 흩어졌고, 일류대를 줄줄이 패스한 형과 누나에 비해 가문의 수치로 남은 나는 차라리 죽고싶다는 생각에 밤거리를 배회하기도 했으나 분식집에서 듣는 그녀의 단무지 강의는 마냥 즐겁기만 했다.
어느 날, 일을 끝내고 혼자 돌아가는 그녀를 따라 한 버스를 타고 사당동 그녀의 초라한 자취집에 가보던 날부터 우리는 친해졌다. 그녀는 경북 D시에 있는 고아원에서 여섯 살부터 자랐노라고 했다. 그녀의 소원은 고아원에서 헤어진 동생을 찾아서 함께 사는 것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그 뒤 우리는 오누이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나는 그녀의 동생을 찾아주겠노라며 함께 그녀가 살았던 고아원을 찾아다니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홀로 외롭게 살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그녀를 보며 나역시 열심히 공부했고, 사당동 판자교회를 다니던 그녀는 새벽마다 나를 위한 기도를 해주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땐 함께 새벽송을 부르며 사당동 거리를 맴돌기도 했다.
이듬해, 그녀의 간절한 기도에 힘입어 나는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고 부모와 형제들의 사랑도 회복했다. 그리고 기쁘고 들뜬 마음에 난 그만 그녀의 얘기를 꺼내며 부모님께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간청했다. 당연히 부모님은 노발대발이셨다. 더구나 그녀가 고아라는 이유로는 도저히…. 나는 가출을 결심하고 집을 나섰지만 짐을 꾸려 그녀를 찾아갔을 땐 거짓말처럼 그곳에 없었다.
세월이 가면서 그녀를 잊어갔다.
잊어가면서 어느 때는 그녀가 그렇게 떠나간 것이 고맙기까지 했다. 살아보니 어짜피 한 때의 풋사랑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중세사회같은 신분의 차는 오늘날에도 엄연히 존재함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리고 영원히 잊혀진 줄만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무엇에 이끌린 듯 기억이 난 것이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거역하면 할수록 그녀를 찾아봐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밀려왔다.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밀려 D시의 보육원을 향해 가고 있었다. 보육원을 찾았을 때 젊은 원장은 내가 누구라는 것도 밝히지 않았는데 내 손목을 잡으며 아주 오래 전부터 나를 기다려온 사람처럼 "오셨군요"하는 것이었다.
"저를 아십니까?" 나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젊은 원장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제사 뭔가 잡혀오는 느낌에 떨리는 목소리로 " 한지혜씨를 알고 계시군요."하고 8년만에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젊은 원장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떨리는 음성으로 "지금… 여기… 있습니까?" 하고 되묻고 있었다.
원장은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곤.
“2년 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죠 폐렴으로…"
내 심장은 그 자리에서 멎는 듯 했다. 원장은 조용히 지난 얘기를 들려주었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여자는 한 아기의 어머니가 되어 보육원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6년 동안 그녀는 자신의 아이와 보육원의 어린 생명을 위해서 눈물겹게 헌신하다가 하나님 품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임종하면서, 언젠가, 누군가가 행여 그녀를 찾아오거든 전해주라던 그녀의 유품을 내놓았다. 낡은 성경책 한 권과 닳고닳은 스텐레스 십자가 목걸이였다. 그 옛날, 내가 사당동 육교 위 좌판 할아버지에게 사서 그녀의 목에 걸어주었던 스텐레스 십자가 목걸이….
그 낯익은 십자가 목걸이가 내 손바닥 위에 놓여지는 순간 나는 그만 고압전선에라도 감전된 사람처럼 그 자리에 꼬꾸라져 통곡하고 말았다. 쏟아내고 쏟아내도 끊어지지 않는 짐승소리 같은 울음은 어둠이 내리도록 계속됐다..
울음이 잦아질 무렵 원장은 조용히 나가더니 잠시 후 겁먹은 듯한 큰 눈망울을 가진 한 소년의 손목을 붙들고 들어와 가만히 불을 켰다.
아아! 불빛 속에 드러난 소년은 바로 그녀였고. 또, 나 자신이었다.
젊은 원장이 왜 나를 단박에 알아보고 "오셨군요"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한 번 화산같이 폭발하려는 가슴을 열어 소년을 으스러져라 껴안았다.
아아! 8년동안 잊고 지냈던 그녀를 되찾은 순간이었다.
아니, 8년간 잃어버렸던 나 자신을 되찾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