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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나는 시골마을에서 자랐다. 읍내에서 삼십 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고작 열여섯 가구가 사는 작은 동네였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쌓인 산골마을의 여름은 언제나 싱그러웠다. 초저녁 여름산에 바람이 불면, 들녘을 휘돌아온 초록 바람이 우리 동네는 물론 낮은 스레트 지붕과 마당을 시원하게 휘감았다. 학교 가는 길가에는 벼가 무럭무럭 자라고 풀숲에서 뛰어나온 청개구리가 가끔 앞길을 막았다. 그 길에 갑자기 소낙비가 내리면 나는 괜히 마음이 동해 포장이 안 된 흙길을 맨발로 걸었다. 부드럽게 젖은 흙을 밟고 걸으면 코끝으로 올라오는 더운 흙냄새와 발에 닿는 촉촉한 감촉이 좋아 그 귀가길은 지루하지 않았다. 집에 오면 언제나 텅 비었고, 엄마아빠는 여전히 들에 계셨다. 동생과 나는 책가방을 집어던진 채 허기진 배를 채우려 감자밭에 나가 감자를 한 바구니 캤다. 그리고 큰 대야에 담고 얇은 수저로 껍질을 박박 긁어 마당 한켠에 걸어둔 솥에 넣고 불을 땠다. 파근하게 익은 감자를 굵은 소금을 솔솔 뿌려 후후 불며 먹다가 서둘러 바구니에 담고 나선다. 우물에서 갓 퍼올린 시원한 물과 열무김치 한 대접을 가지고 엄마와 아빠가 일하는 들로 새참을 갖고 나가는 것이다. 검게 그을린 얼굴로 멀리서 나를 부르는 엄마 목소리는 언제나 정겹다. 얼른 내 바구니를 받아들며 대견한 듯 바라보는 엄마와 냇물에 손을 뿌득뿌득 씻으며 ‘우리딸 이제 다 컷네’ 하시며 함박웃음 지으시던 아빠의 모습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한 장의 사진이다. 먹음직스럽게 잘 쪄진 감자를 그늘이 드는 밭둑에 앉아 가족이 함께 먹는 맛은 또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돌아오는 길엔 이른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집 앞 고추밭으로 달려가 싱싱한 풋고추를 한 바가지 따온다. 그것을 씻어 손으로 반씩 뚝뚝 끊어 집에서 담근 간장에 넣고 감자를 조려둔다. 동생은 지금도 가끔 그 반찬을 먹고 싶다고 한다. 어둑어둑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엄마가 돌아와 마당 한가운데에 놓인 툇마루에 저녁상을 보신다. 그때쯤 논둑에 소꼴을 베러 가셨던 아버지가 지게 가득 소먹이를 한 짐 지고 오신다. 그 모습을 본 누렁이가 벌써부터 ‘음매음매’ 울어 대면 아버지는 얼른 풀 한 아름을 던져주며 “그려 그려 이눔아”하며 자식처럼 송아지 등을 쓰다듬는다. 아버진 땀 찬 윗옷을 벗으며 우물가에 엎드리고 남동생은 두레박 가득 넘치는 물을 아버지 등에 확 들어붓는다. 찬 기운에 깜짝 놀란 아버지가 너털웃음을 웃으며 “어 시원하다!”를 연발하고 남동생은 신이 난 듯 연신 아버지 등에 찬물을 끼얹는다. 난 그 곁에서 하루 동안의 농사일로 더러워진 아버지의 여름나기 필수품인 하얀 고무신을 철수세미로 닦는다. 늘 하얗게 닦아내는 내 솜씨에 아버지는 또 한번 함박웃음을 지으신다. 아버지가 베어 오신 한 무더기 인진쑥에 불을 지펴 모기를 쫓고, 호박잎 쌈 한 입 가득 담고 새콤 시원한 오이냉국을 한 수저 떠먹는 우리 식구의 저녁식사. 저녁상을 물린 툇마루에서 밤하늘 별을 보노라면 그 황홀함에 빠져 달려들던 모기떼도 잊고 사춘기 소녀는 시인이 되어 가슴속에 또 하나의 시를 쓰곤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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