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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형편이 어려워 인문계고교를 진학하지 못한 나는 야간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회사에 입사했다. 대학을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편찮으신 엄마와 동생들을 생각하니 차마 내 욕심만 채울 수 없어 진학을 포기하고 바로 취직을 한 것이다. 갈등은 심했지만 먹고살기에 바빴던 시절이라 정신없이 회사 일을 하다보니 그런 대로 적응을 하게 되었고, 회사일도 조금씩 재미가 붙었다. 그렇게 5년간 회사를 다녔고, 어느 정도 여유만 생기면 야간대학이라도 가려고 틈틈이 책을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회사에 재미를 느끼게 만든 것은 다름아닌 내 입사동기인 정미씨 덕이었다. 나와 같은 날 입사한 이 여자친구는 밝고 명랑한 얼굴로 회사분위기를 살려주었고, 내게도 언제나 따뜻한 미소로 대하는 단짝이었다. 고달팠던 내 생활을 즐겁게 해 준 삶에 등불같은 존재였다. 그래도 내겐 대학을 가고자 했던 꿈이 있었기에 회사일이 끝나면 입시학원으로 달려가 12시까지 강의를 듣곤 했다. 그런 다음날 잠이 덜 깬 모습으로 부스스하게 출근하면 그녀는 드링크제를 눈치껏 따주며 얼른 먹으라고 눈짓을 하기도 했다. 착하고 정겨운 모습에 언제나 내 마음을 푸근하게 했던 정미씨는 알고보니 나보다 더 어려운 환경을 헤쳐나가고 있는 소녀가장이었다. "난 돈을 벌어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 진학하면 내 힘으로 공부를 하고 싶고, 그러러면 돈이 필요하잖아. 그래서 회사를 다니지. 넌 왜 회사에 나오는데?" 정미씨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난 우리집 장녀야. 장녀로서 맡은 책임이 있어서…."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몇 년 전 암으로 돌아가셨고, 그때의 수술빚을 갚기 위해 어머니는 지금도 막일을 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아직도 학교에 다녀야하는 어린 두 동생과 병든 할머니를 모시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동생들이라도 꼭 공부시키겠다며 학비를 벌기위해 낮에는 회사에서, 밤에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형편상 대학진학은 꿈도 꾸지 못한 채, 오직 엄마와 함께 빚을 갚는 일과 동생들 학비를 대기에 급급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티 없이 밝은 얼굴로 회사생활을 하고 있을 줄이야…. 그러던 얼마 후 회사가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부도의 목전까지 간 회사는 간신히 위기를 넘겼고, 뒤이어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입사동기인 우리 둘 중 하나는 감원대상이었다. 난 며칠을 고민했다. 다시 취직을 하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감원바람이 불면 대부분은 결혼적령기에 있는 여성이 먼저 잘리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절망할 것을 생각하니 내 가슴이 먼저 아파왔다. 나는 대학진학의 꿈도 좀 더 나중으로 접고, 안되면 노가다판이라도 뛰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음날 회사에 사표를 냈다. 나보다 더 간절한 삶을 살아야 하는 그녀에게 해 줄 것은 그것밖에 없을 것 같았다. 물론 그녀에겐 다른 일자리가 생겼다고 거짓말을 했다. 반신반의하며 눈물을 글썽거린 그녀는 꼭 바로 연락을 달라고 했다. 취직을 하면 바로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1년이 넘도록 나는 아르바이트로 일용직으로 흘러다니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잘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내가 그녀를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혹여 그렇게 생각할까봐 만남도 뒤로 미루고 있다. 또한 대학을 가고자 했던 목표도 자꾸만 미뤄지고, 가정형편도 드라마처럼 그렇게 나아지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내 마음엔 둥근 달하나가 언제나 밝게 떠 있다. 나나 그녀나 열심히 살고있기에 우리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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