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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나는 육십대 초반의 젊은 할머니, 할아버지다. 남편은 충청도 토박이라 젊었을 때부터 애정표현을 기대하긴 힘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모두가 그렇게 살았고,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애들보고 인내하고 살았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가부장적이었고, 여자들은 시집살이하고 자식키우고, 돈아끼며 살림살고 시동생 시누이 뒷바라지 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며 살았다. 그저 ‘고맙다’고 다정하게 말 한마디만 해줘도 시름을 잊고 살았을텐데 그런 말 한마디에도 인색했던 남편. 지금 생각하면 ‘왜 그 고생하면서 참고 살았지!’ 하는 후회가 들 때도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무뚝뚝하던 남편도 명예퇴직 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차츰 잔소리 많은 좁쌀영감으로 변해가 때로는 짜증이 날 때도 많다. 딸애를 결혼시키자마자 조용한 시골로 내려와 텃밭을 일구며 살게 됐는데, 나무에 재미를 붙여 하루종일 과일나무랑 지내다가도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하루에도 몇 번씩 냉장고 문을 여닫으며 ‘반찬통 뚜껑을 제대로 닫았니 안닫았니, 왜이렇게 정리를 안하고 엉망으로 해두었니’ 등 잔소리를 해대며 심심해했다. 젊은 날 그렇게도 활동이 많던 사람이 갑자기 적적한 시골에 적응하려니 그렇겠지 하고 이해는 하면서도 젊어서도 고생했는데 늙어서까지 남편 시집살이를 살 수는 없지 하는 생각에 나역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그러나 붉게 물든 저녁해를 같이 바라보기도 하고, 밤늦은 시간 들리는 작은 풀벌레 소리를 함께 들을 때면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이사람과 이 한 생을 사는 것일까…’ 하는 감상적인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 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식사를 마친 남편이 갑자기 “우리 신랑각시놀이 할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이 양반이 저녁 잘 드시고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이에요?” 하며 어이없이 웃자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남편이 냉장고에서 무엇인가 꺼내더니 싱크대로 가 깨소금을 빻는 조그만 절구를 꺼냈왔다. 그리고 손에 든 것을 ‘콩~ 콩~’ 공이질을 하고는 곁으로 다가앉아 “각시 봉숭아물 들여줄까?” 라며 손을 잡아당기는 것이 아닌가. ‘그냥 농담하는 거겠지’ 했는데 어느 틈에 비닐조각과 실까지 준비한 남편은 새끼손가락과 약지에 다진 봉숭아꽃과 잎을 올려놓고 비닐로 싼 뒤 풀어지지 않도록 실로 꼭꼭 매주었다. 그런 남편을 바라보며 갑자기 감격한 나는 아무 말도 못한 채 평소답지 않은 남편의 행동만 가만히 바라보았다. 남편은 조심스레 실을 묶으며 “ 우리 때는 부모어려워 어디 마누라 이쁘단 말을 할 수나 있었나. 요즘 테레비에 젊은 사람들을 보니 당신이 참 억울하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구만….” 허리를 구부리고 눈이 어두워 돋보기를 끼고 실을 묶는 남편. 그 젊고 남자다웠던 얼굴에는 잔주름이 늘고 까맣던 머리는 서리를 맞아 이제는 뽑아서는 해결할 수 없는 반백이 되었다. 무슨 말인가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못한 채 눈시울만 뜨거워졌다. 결국 늙어서야 부부가 된다더니…. 다음 날 설레는 마음으로 일찍 일어나 실을 풀고 비닐을 벗겨 보니 다섯손가락 끝으로 남편의 속깊은 사랑이 곱게 물들어 있었다. 60대 여인의 손에 붉은 봉숭아물이 들었으니 조금은 주책이 아닌가 하는 부끄러움이 일었지만 마음은 타임머신을 타고 20대 젊은 날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사랑받는 느낌. 그것은 늙으나 젊으나 모든 여성의 꿈이자 치료제인 모양이다. 남편이 물들여준 봉숭아 꽃물하나에 지난 날의 그 미움과 고생들이 눈녹듯이 없어졌으니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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