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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또 와 있네.˝ 친구 미정이가 나를 보며 말했다. ˝저 남자 대단하다.˝ 도서관 창밖을 내다본 나는 그 남자의 뻔뻔함에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그는 내가 아무리 오지말라고 면박을 줘도 매주 금요일이면 어김없이 정문 앞에서 나를 기다렸다. ˝너,왜 또 왔니? 그렇게 오지 말라고 했는데….˝ ˝누나가 오지 말라고 했다고 내가 안 올 사람이야?˝ 그렇다. 이 남자는 나보다 두 살 연하였고, 내 남동생의 친구다. 어린시절 옆집에 살았으니까 서로 알고지낸지 20년이 넘었다. 친구집에 놀러온다는 핑계로 그는 어렸을 적부터 우리 집에 드나들었고, 나는 그를 그냥 동생친구로만 여겼다. 그러나 그가 대학생이 되면서 사뭇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성인이 되자 그가 적극적으로 내게 다가왔고, 스토커처럼 학교나 집 앞에서 기다리고, 나를 미행까지 하는덴 참을 수가 없어 경찰에 신고한다고 협박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는 달라지지 않았다. ˝야, 넌 내 동생 친구야. 난 네가 남자로 안보여. 그러니까 이젠 좀 그만해라.˝ ˝누나, 난 다섯 살 때부터 누나를 좋아했어. 그때 이후 지금까지 다른 여자를 좋아해본 적이 없어. 난 언젠가 누나하고 반드시 결혼할꺼야." ˝ 보다못한 동생 녀석이 그를 만나 술을 마셔가며 달래봐도 소용이 없었다. 부모님도 그 남자가 나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탐탁해하지 않았다. 엄마가 그를 싫어하는 진짜 이유는 그가 가난한 집 외아들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집은 아버지가 갑자기 사고를 당해 가세가 기울었고, 어머니 혼자 1남4녀를 키운 가정이었다. 엄마는 그 남자가 나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이후부터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혹여 내가 연민으로라도 그에게 마음을 줄까봐 노심초사하신 것이다. ˝가난한 데다 외아들이지, 아버지도 편찮으셔…, 말도 안되는 소리. 누구 딸 데려다가 병 수발을 시키려고….˝ 나는 그때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한 법대생과 만나고 있었고 엄마는 속으로 내가 그 법대생과 결혼하기를 은근히 바라셨다. 물론 그 법대생을 운명적인 사랑으로 생각지는 않았지만 성격도 무난하고 그 정도면 손색이 없다고 나도 생각했다. 심장이 마구 뛰고, 밤잠을 못 이루는 사랑은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가능한 것이 아닌가. 정없이는 살아도 돈없이 못사는 것이 또 현대의 결혼생활이 아니던가.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생겼다. 어느 날 그가 내 아르바이트 장소로 불쑥 찾아왔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마침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던 내 친구들과 합석을 시켰다. 어색하게 앉아 있다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친구들에게 하는 말이 들렸다. ˝저는 정선이 누나하고 결혼할 겁니다. 아버지가 아파트도 하나 사주신다고 했고, 일단 한국에서 살다가 둘이 유학갈 계획이에요. 신혼여행으로는 한 달 정도 유럽일주를 생각하고 있어요.˝ 기가 막혔다. 화가 난 나는 ˝너 왜 내 친구들한테 그런 거짓말을 하니?˝ 하고 다구쳤고, 그는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선 ˝미안해. 누나 친구들 앞에서 내가 못난 놈으로 보이는 건 싫었어. 누나가 초라해보이는 것도 싫고….˝ ˝야! 내가 언제 너하고 결혼한댔니!˝ “물론 조건이 좋은 사람들도 많겠지만 나만큼 누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었어 내가 누나를 알기 시작한 지 벌써 25년이야!” 그 25년이란 말에 갑자기 가슴이 막막해졌고, 그때부터 작은 연민이 싹튼 것은 또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도대체 내가 뭐길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좋아할 수 있단 말인가. 어쨌든 난 그와 결혼했다. 남매를 낳았고, 고생 무지했고, 후회하고 눈물짜고 가슴칠 때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고 스스로 행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행복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참고 노력했다. 법대생과 결혼을 했어도 후회는 찾아왔을 테니까. 오늘도 그는 내게 말한다. ˝당신이 자고 있는 모습만 봐도 행복해. 내가 어떻게 당신을 잡았는데…. 정말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나는 행복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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