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일 집에 좀 들러라 ” 시어머니 전화였다. 한창 가을 농번기 바쁠 때라 일하러 오라는 말인가 싶어 짜증부터 났다. 애가 둘인데 무슨 농사일을 거들란 말인가. 친정에서도 어릴 적부터 농사일을 거들며 자라온 터라 농사일만큼은 지긋지긋했다. 두 아이를 키우며 부업으로 조그만 가게까지 운영하고 있는데 며느리 입장은 조금도 생각을 안해주나 싶어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어쩌랴. 애들을 유치원에 보낸 후 부랴부랴 시외버스에 올랐다. 한나절동안 돕는 시늉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다. 어머님은 뜻밖에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날 기다리셨다. 그리곤 곧장 시내에 있는 전자제품 매장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내가 너 김치 냉장고 하나 사 주려고 오라고 했다.” 갑자기 무안한 마음에 “안사주셔도 돼요. 제가 나중에 장만할께요” 하고 사양해도 막무가내로 손을 잡아끄셨다. 한참을 실랑이한 끝에 어머님께서 권하시는 김치냉장고를 골랐다. 시골 살림에 남의 집 일까지 하시며 받은 품삯을 모으신 게 뻔한데 그 돈으로 며느리에게 김치냉장고를 사주신 것이다. “어머니, 이걸 저를 사주시니 좋긴 하지만 마음이 편하질 않네요” 하니까 “너희가 집 장만해 들어가면 그때 사 주려고 했는데 그보다 당장 맛있는 김치 좀 먹게 해주고 싶어서 서둘렀다. 요즘 애들은 김치를 잘 안먹는다고 하더라만 김치 냉장고에 넣어둔 김치가 시지도 않고 맛있다고 하니 애들 맛있게 담아먹여라. 너 집안일도 바쁜데 김치 일손이라도 덜으라고 사주는 거다. 이렇게 사 주니까 내가 더 좋구나. 이제 곧 김장하면 김치 많이 넣어 두고 맛있게 먹어.” 나는 저절로 눈물이 핑 돌아서 뭐라고 고맙단 인사도 못한 채 다시 버스에 올랐다. 고부간이란 무엇인가, 영원히 정이 안들 것 같다가도 어떨 땐 하염없이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요즘은 시어머니 시집살이란 말보다 며느리 시집산다는 말이 흔한 시대다. 이웃에 사는 젊은 주부들도 시어머니가 김치를 담아준다는 둥, 아이를 맡아서 길러준다는 둥 해서 시부모의 혜택을 받는 주부들이 많다. 물론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주부도 있지만 함께 사는 대가족보다는 대부분 따로 살면서 오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다보니 시어머니께 뭔가를 해드려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뭔가를 해주지 않나, 시골에 땅이라도 팔아서 집사는 데 보태주지는 않나’하고 바라는 경우가 많다. 남편이 좋을 땐 시부모 생각을 좀 하다가도 부부싸움이라도 하는 날엔 모두가 웬수처럼 미워지기만 한다. 그러나 당신은 식구가 단촐하니 김치냉장고가 필요없다며 부득부득 사주신 시어머니. 가격도 만만찮은데 선뜻 거금을 쓰신 시어머니를 생각하니 새삼 친정어머니와 다른 정을 느끼게 된다. 나 역시 나이 들면 시어머니가 될 것이고, 피가 섞이지 않은 며느리가 내 자식처럼 모든 것이 이해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 시어머니처럼 진심으로 아끼고 뭔가를 애정으로 주고자 한다면 철없는 며느리도 조금은 생각하며 살게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정이란 어짜피 저절로 붙는 것은 아니니까. 배달 온 김치냉장고를 보면서 입이 벌어지는 나 자신을 보며 새삼 많은 것이 부끄러워진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