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이가 들어 새해를 맞으니 새삼 ‘이대로 사는 게 과연 옳은 삶인가?’ 하는 회의가 일었다. 그건 몸이 예전만 못하다는 느낌과 함께 ‘생노병사’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원초적 고민과 같은 것이었다. 죽을 때 갖고 갈 수 있는 것은 ‘선’을 행한 것밖에 없다는데, 그동안 먹고살기 바빠서 이웃을 뒤돌아본 일은 없었다. 그러나 나눔이란 자칫 받는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베푸는 사람이 우월감을 갖기 쉽다. 특히 요즘은 학생들 자원봉사가 점수에 반영되는 시대라 의무적으로 봉사할 곳을 찾아다니는 아이들이 봉사라는 말을 지겨워하는 경우도 보았다. 억지로 나누고 봉사하는 것은 차라리 아니함만 못한 것이 아닌가. 어떻게 하면 따뜻하게 나누고, 나눈 것조차 잊으며, 받는 사람도 기분 좋게 할 수 있을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늦게나마 조금이라도 저승 갈 밑천은 장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자식에게 돈을 물려줄 게 아니라 부모가 어떤 일을 했다는 것도 보여줘야 한다는 자각이 일었다. 늘 생각만 하고 실천을 못했는데, 병을 한번 앓고 나니 ‘망설이면 늦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유는 없다. 그러나 여유 있을 때를 기다리면 평생 실천하지 못하리라. 다 큰 아들을 재촉해 수퍼마켓에 갔다. 그러나 요즘같이 물가가 비쌀 때는 참치 캔 하나 더 사는 것도 쉬운 선택은 아니다. 그래도 나눔의 실천은 한지에 물이 스미듯, 조용히 표 없이 하는 것이 ‘정석’이란 말에 눈 꼭 감고 실천해보기로 했다. 슈퍼에 갈 때마다 보관할 수 있는 식품을 하나씩 더 샀다. 참치캔 하나, 과자 한 봉지, 작은 봉지쌀 등. 그리고 그것을 커다란 식료품 봉지에 담아 자동차 트렁크에 보관했다. 봉지가 가득 차면 그것을 무료급식소나 자선단체, 푸드뱅크 같은 곳에 들고 갔다. 가져다줄 때는 반드시 아들을 동행했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앞에 작은 봉지하나 내밀기는 차라리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간단한 인사말만 나눈 채 얼른 돌아섰다. 자칫 자신이 큰 선행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까봐 우려됐기 때문이다. 트렁크 안에 식료품 봉지가 가득 차고 그 물건을 영아원 등에 가져다줄 때, 서로 물건을 가지려고 다투는 아이들을 보면 좀 더 많이 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 날도 나는 수퍼마켓에서 장을 보다가 진열대에서 우유에 타먹는 시리얼 한 상자를 집어들었다. 그리곤 "오늘 봉지채우기는 이걸로 할까?" 하고 아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들은 얼른 내 손에서 시리얼 상자를 빼앗으며 "엄마, 아이들은 이것보다 설탕 묻은 콘프레이크를 더 좋아해요~." 한다. 순간 받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잊은 기분이다. 따뜻하게 나누고, 배푼 것은 잊으며, 받는 사람의 인격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아들이 나보다 먼저 체득한 것 같아 기뻤다. 역시 무조건 실천을 하고 볼 일이다. 이런 쇼핑을 가끔 하다 보니 아들과의 대화도 많아졌다. 아!~ 이래서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중독이 된 듯이 또 그렇게 아름답게 사는 모양이다. 어리석은 중생에게, 늦기 전에, 병을 통해 그것을 깨닫게 해주신 신은 참 위대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