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등학교 시절 나는 한 달에 한번 꼴로 반쪽짜리 편지를 받았다. 시골계신 아버지가 종이 한 장도 아끼며 보내신 편지 봉투에는 '최달호 앞'이라고 써있었지만, 편지는 가끔씩 '영숙아.'로 시작되었다. 가위로 반쪽만 자른 누런 종이에 연필로 꾹꾹 눌러가며 서툰 글씨로 쓴 아버지의 편지…. ‘영숙아, 보내준 돈은 네 오빠 등록금으로 보냈다. 고맙다. 네 오빠는 나보다 더 너를 고맙게 생각할 게다….’ 여동생 영숙이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버스차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 시절엔 버스에 열네댓 살 안팎의 여자아이들이 차장 일을 하며 일일이 손님에게 요금을 받곤 했다. 출퇴근 시간 버스는 언제나 만원이어서 그 여린 몸으로 꾸역꾸역 손님을 밀어넣었고, 문도 채 안닫친 버스를 ‘탁 탁’ 두드리며 “오라잇!” 하고 소리쳐야 버스가 출발하곤 했다. 새벽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하루종일 버스를 타고 다니며 시달려야 하는 힘든 직업. 어려운 형편에 내가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로 전학하자, 중학교도 못다닌 영숙이가 차장으로 나선 것이다. 자취를 하며 학교에 다녔던 나는 늘 바빴고, 동생은 버스회사 합숙소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서로 만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날에는 어떻게든 틈을 내어 영숙이를 찾아갔다. 버스 종점에 서서 기다리다 보면 동생이 일하는 버스가 들어왔다. 나를 발견한 영숙은 반가운 손짓만 보내곤 사무실로 뛰어들어가 요금을 납부했다. 그런 뒤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몇 분 동안 나와 얘기를 나눴다. "오빠, 편지!" "자, 너도" 우리는 그렇게 서로 아버지의 편지를 바꿨다. 영숙이가 받은 편지는 '달호야.'로 시작됐다. '이번에 네 성적이 더 올랐더구나. 기쁘다. 이 아비보다 영숙이가 더 기뻐할 거다. 너는 아무 생각말고 공부나 파고들어라.' 편지도 아직 덜 읽었는데 저쪽에서 운전기사가 '빵빵'거렸다. 영숙이는 서둘러 달려가며 말했다. "오빠, 잘 가! 노는 날에 오빠한테 갈께. 빨래하지 말고 그냥 둬." "한 달에 겨우 하루 노는데 그냥 쉬어." "아버지가 편지에 그러라고 하셨어." "미안해 영숙아." "오빠는 별소리를 다한다." 하얀 이를 내보이며 잽싸게 버스 안으로 사라지는 동생을 바라보며 나는 어서 학업을 마쳐 동생의 고생을 덜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생을 만나고 온 날이면 밤을 꼬박 새우며 책과 씨름을 했다. 나는 그렇게 공부하며 대학을 졸업해 제법 괜찮은 직장인이 되었고, 동생은 성실한 운전기사를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결혼과 함께 각기 가정을 꾸려오며 다른 인생을 살았고, 어느 새 사오십대 중년이 됐다. 어떻해 사는 것이 옳은 인생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고생모르고 자란 아내보다 가끔씩 푹 퍼진 아줌마가 된 동생이 더할 수 없이 편하고 이뻐서 뭐라도 해주고싶은 심정이 될 때가 있다. 그것이 단지 빚진 기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불현듯 가슴이 아려올 때면 갑자기 아이들을 앞세우며 "여보, 우리 지금 애들 고모한테 갔다 옵시다." 하고 말하게 된다. “고모네가 다녀간 지 한달도 채 안 됐는데 뭘 가요?" 아내가 이상한 듯이 물었다. “한 달이면 오래지, 오래 못 봤잖소 보고 싶어 그래요."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는 아내를 둔 채 “얘들아, 뭐하니? 어서 가자."하고 재촉하자 “꾸물거리는 건 아빠예요. 빨리 오세요." 고모라면 사족을 못쓰는 아이들이 먼저 차 안으로 들어가 '빵빵'경적을 울렸다. 문득 지난날 영숙이를 만나러 가 종점에서 듣던 그 경적소리가 떠올라 갑자기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