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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도장이 하나 있다. 이미 20년이나 지난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중학교에 입학하려면 입학원서에 찍을 도장이 필요하다며 선생님이 개인도장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교육계에 근무하며 5남매를 연이어 대학교육까지 시켜야 했던 나의 아버지는 새 도장을 파주지 않고 잠시 망설이더니 궁여지책으로 아버지 도장을 깎아버리고 손수 서툰 솜씨로 내 도장을 파주셨다. 친구들은 모두 도장집에서 판 번듯한 새도장으로 세련되게 도장을 찍는데, 나는 손때 타서 거무죽죽한 나무도장을, 그것도 잘 쓴 글씨가 아닌 비뚤어진 글씨의 보잘 것 없는 도장을 찍는 게 부끄러워서 누가 볼세라 어디서 훔쳐온 도장마냥 살짝 찍었다. 남이 가진 것보다 내 것은 항상 못하다는 사실이 어쩌면 그렇게도 부끄럽고 서러웠던지…. 그러나 의과대학을 합격했을 때, 그리고 졸업 후 각종 진단서나 서류에 도장을 찍을 때마다 그 도장은 나의 분신처럼 내 이름을 대신하며 곳곳에 찍혀나갔다. 너무 메만져서 매끌매끌해진 그 도장은 내 철듦과 함께 검어져갔고, 아버지의 깊은 사랑만큼이나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나이가 들어서는 도장을 찍을 때마다 못생긴 도장을 부끄러워했던 철없던 시절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번지곤 했다. 사연을 모르는 주위의 많은 이들이 내 도장을 보며,“과장님! 돈벌어 어디 쓰십니까? 신분에 맞게 좋은 걸로 다시 파세요.”하는 충고도 하고, 또 실제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주 값비싼 고급 도장을 선물로 사온 분도 있었지만 나는 오로지 그 못생긴 도장만을 사용했다. 자식들 학비대느라 평생을 검박하게 사신 아버지를 생각하니 쓰지 않으면 배은망덕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런데 우연히도 30년 만에 아버지가 그 도장을 보실 기회가 있었다. 아버진 깜짝 놀라며 미안해하셨고, 나는 밤새워 손수 파주신 얘기며, 딴 애들과 비교해 너무 보잘것없는 도장이라 부끄럽고 서러워서 울기도 했다는 지난날의 이야기를 들려드렸다. 그 후 아버지로부터 소포가 하나 보내져 왔다. 열어보니 아버지가 수십년을 쓰시던 상아 도장을 깎아내고 내 이름을 예쁘게 새긴 도장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도장과 함께 곱게 접어 넣으신 짧은 글. 「순옥아! 아버지가 새겨준 것이라며 30년이나 간직해온 네 도장을 보니 가슴이 뭉클하구나. 키울 때 잘해주지도 못하고 고생만 시켰는데 아버지가 파준 거라며 지금껏 간직했으니 고맙고도 미안하다. 그렇지만 이제 그 도장을 계속 쓰기엔 너무 보잘 것 없는 것 같아 아버지가 평생을 써왔던 도장으로 다시 네 이름을 새겨 넣었단다. 나는 정년퇴임을 하고 나니 도장찍을 일이 별로 없어서 네 것을 만들었으니 유익하게 써다오….」 나는 그만 울음을 왈칵 터트리고 말았다. 그 도장 속에 새겨진 아버지의 모든 고생과 설움이 잡힐 듯 아릿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때에 비하면 너무나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고 풍족한 요즘의 나의 삶을 생각하니 나는 내 아이들에겐 평생을 두고 간직할만한 정성어린 선물을 남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면 날마다 공부, 공부하며 살아야 하는 그 아이들에게 바쁘게 뛰어다니는 이 삭막한 엄마가 동심어린 무엇을 남길 수 있을 것인가? 요즘은 자녀를 하나, 둘만 낳아 세상에 좋은 것은 다해주고, 모두가 공주 왕자처럼 키우지만 풍요한 우리세대가 가난했던 우리 부모세대처럼 진정 가슴저린 선물을 자녀에게 남길 수 있을까 생각하니 아무래도 고개가 자꾸만 가로저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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