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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를 마치고 텔레비전을 보는데, 남편이 편지봉투를 내밀었다. ‘시부모 모시느라 고생했다. 아이들 건실하게 키워줘서 고맙다. 무사히 정년퇴직한 것도 모두 당신 덕이다. 처음으로 이렇게 편지를 써본다 고마워서….’ 내 평생 남편으로부터 들어보지 못한 말들이 적혀있었다. 퇴임하고 집안에만 있다 보니 마누라 눈치가 보였던 모양이다. 어쨌든 편지를 받고 보니 조금은 미안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해서 그냥 퉁명스럽게 “뭘 늙어가지고 이런 편지야~” 하며 슬그머니 서랍에 넣었다. 조금은 안쓰럽기도 했지만 퇴임 후 남편이 집안에만 있으니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려졌다. 요즘같이 더운 날 삼시 세끼 밥 차리는 것도 고역이고, 때때마다 반찬거리 장만하는 것도 골칫거리다. 또 마누라는 밥하랴 집안 치우랴 바쁜데 거실 소파에 앉아 TV 리모콘으로 손가락 운동만 하고 있는 남편을 보면 속에서 천불이 난다. 나이 들어서도 집안일은 여자만 해야 하는 줄 알고 있는 그 가부장적인 자세가 괘씸했다. 또 남편이 집안에 있으니 우선 잔소리가 장난이 아니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도 마음대로 놀지도 못한 채 서둘러 귀가해야 한다. 퇴임 후 처음 몇 달은 함께 여행을 다니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 지루하고 답답한 일상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답답함이 우울증으로까지 번지려고 한다. 그래서 편지를 받은 김에 남편에게 한 가지 다짐을 받았다. “이제부터 점심은 당신이 알아서 챙겨먹고 설거지까지 해놔요, 나도 친구들 만나서 좀 마음편히 놀게” “???” 남편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말은 없었다. 내심 세끼 밥을 다 차리게 하는 것이 미안하긴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뭐라도 배워요, 요리학원에라도 다녀보든지, 사람이 살다가 어떻게 될 줄 알아, 그리고 당신 그냥 이대로 지내긴 너무 젊잖아요!” 내심 속에 쌓였던 말들을 쏟아낸 것이지만 뜻밖에 남편은 선선히 그러마고 했다. 아마 본인도 무척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시작된 남편의 늦공부는 자격증 시험 도전에까지 이르렀다. 한식요리사, 한자지도사 등등. 우선은 학원을 다닌답시고 외출을 하니 반갑고, 집안에만 있지 않으니 때마다 밥을 차리지 않아서 좀 편해졌다. 그러나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기고 말았다. 남편의 늦공부가 속도가 붙어 ‘이것도 배우겠다, 저것도 전망이 있다더라’ 등 어디서 주워들은 얘기로 밤을 새우니 퇴직금 들고나가 사업한다고 덤빌까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이다. 모험을 하기엔 우린 너무 평범한 사람들이 아닌가. 어느새 나는 남편의 외출이 두려워져 악처가 되고 말았다. 다시 답답한 일상이 계속되더라도 건강이나 챙기고 집에만 있으라고 소리쳤다. “당신 눈에 핏발 섰잖아. 생산적인 일을 하라고! 쓸데없이 친구 만나서 술 먹다 명 단축시키지 말고!….” 부부는 역시 원수가 만나나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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