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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생 저학년이었던 어느 날, 동네 모퉁이에서 오뎅 국물을 떠먹는 다른 아이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처음 팔기 시작한 바지와 모자가 달린 새 돕바를 입고 있던 나는 모자만 연신 썼다 벗었다 하며 빈 주머니의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는데 “얘, 변전소가 어디 있지?” 하고 묻는 중년 신사의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안면있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가 알고있는 곳을 묻기에 나는 “저를 따라 오세요”하며 안내했다. 나와 제일 친한 윤이도 같이 갔는데, 언덕 위로 올라서자 서늘한 9월답지 않게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나무 밑에 잠시 몸을 피하고 있는데, 그 아저씨가 “얘들아, 니들 옷 벗어라 비에 젖겠다. 옷 버리면 엄마 아빠가 좋아하지 않으실거야.”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 말을 듣고 아무 생각없이 새 옷을 벗어 그 아저씨에게 맡겼다. 어린 나이에 무얼 알았으랴…. 신사는 내 옷을 착착 접어 가방 속에 넣더니 변전소 근방에 가서 돌려주겠다고 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목적지를 불과 2백미터 앞두고 있을 때 그가 급하게 내 손에 100원을 쥐어주며 “얘, 저기 가서 빵을 좀 사오련?”했다. 나는 친구와 같이 얼른 빵 가게로 뛰어갔으나 문이 닫혀 있었다. 애석한 마음으로 돌아와 보니 어느새 신사는 골목 어귀를 돌고 있었다. 쏜살같이 내빼는 뒷모습을 보인 채….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나는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받아 조그마한 섬유공장의 책임자가 되었고, 어린 시절의 그 일은 까마득히 잊은 지 오래였다. 그 날도 비가 약간 내리고 있었는데, 동창 한 놈이 할 말이 있다며 다방에서 기다리겠다는 전화가 왔다. 대낮부터 술을 했는지 녀석은 만나자마자 붉으레한 얼굴에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대뜸 물었다. “야, 너 혹시 어렸을 때 새 옷 잃어버린 일 기억하니?” “…?” “우리 아버지가 실직한지 2개월 되던 날이었어. 나는 아버지 밥통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새옷을 사달라고 졸랐었지. 어느 날 나와 했던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며 새 옷을 한 벌 가지고 오셨더라.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었지. 난 기분좋게 그 옷을 입었어. 그런데 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간 네 이름이 새겨진 작은 뿔 명찰이 있는 게 아니겠니!….” “…….” “난 아버지께 말도 못했고, 또 그 옷을 입지도 않았지.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런 몹쓸짓을 했으니 이해해야 할지 용서를 해야할 지…. 어린 날의 그 상처는 평생 아버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고, 난 홀로 방황했다. 그리고 언젠간 네게 고백해야한다고 다짐하며 어른이 됐지. 그런데 며칠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평생 그 때의 잘못을 가슴에 못박듯 간직하신 모양이야. 유언처럼 고백하시더군. 어린아이에게 저지른 그 죄는 저승까지 가지고 갈 것 같다고…. 나도 아들을 키우는 아버지가 되고보니 그 때의 아버지 심정을 눈꼽만큼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용서는 안되겠지?….” 창밖으로 흐르는 빗물처럼 친구의 눈에서도 하염없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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